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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노동 2-근대 이후 미술 속의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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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1. 미술 속의 노동

1-1-1. 개신교의 노동관

노동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것은 전적으로 근대사회의 산물만은 아니다. 이미 고대의 견유학파나 스토아학파는 노예제 사회의 필수적인 부분인 육체노동에 대한 모욕에 반대하였다. 중세 수도원은 육체노동에 대한 나쁜 평판을 씻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고대의 스토아 학파가 사상의 주류는 이니었고 중세 기독교 역시 본질적으로 인간의 노동이 하느님의 징벌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노동의 인식은 근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완전하게 변모한다. 그것은 종교개혁을 통한 개신교의 출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개신교 중 특히 칼뱅주의Calvinism은 노동이 아담의 불복종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는 종래의 가톨릭 교회의 원칙을 수정하고, 당시 생산활동을 통해 성장하던 중산계급의 사상적 지주로 떠올랐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물질적인 선물을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 최상의 종교적 의무라는, 색다른 사상을 강조함으로써 중산적 생산자층을 순조롭게 성장시킬 자본주의 사상이 되었다. 칼뱅주의는 신의 절대 지상권을 강조하여 자기를 신의 도구로서 자각하고 신의 영광을 위해 생활 전부를 금욕적으로 조직해야 한다고 하면서 직업 노동이야말로 진실로 신의 영광을 실현하는 장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한다는 정신이 작용하여 직업 노동에 적극적으로 정진하게 되었다. 속세의 쾌락을 버리고 일상생활을 조직적으로 합리화하여 전 에너지를 직업노동에 집중하는 태도가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인간상이 자본주의적 발전을 추진하는 주체가 된다.

1-1-2. 풍속화

I7세기에 다른 나라가 절대주의의 바로크 예술속에 있을 때, 가장 먼저 중산계급의 사회로 탈바꿈한 네덜란드에서 일상생활속의 노동이 예술의 주제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전통적인 주제인 종교와 신화의 주제 외에 농촌이나 도시의 일상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풍속화 genre painting가 등장하는 것이다. '밑바닥 생활' 회화인 풍속화는 종교적 신화적 회화의 대칭 개념으로 쓰였다. 네덜란드에서 신흥 시민계급은 구 귀족계급과는 달리 종교나 신화 등 초현실적인 회화를 기피하고 대신 현실 생활을 담은 회화를 선호하였다. 이 결과 사회적 활동에서 생산자의 기능을 가진 농민과 직공 들이 회화의 주제로 묘사되기 시작하였다.

I7세기 네덜란드 미술가들은 그 수요자의 관심에 따라서 도시 부르주아의 입장에서 바라본 농촌과 농민을 형상화하였다. 풍속화의 한 목적은 사회적 경제적 성공은 개인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신흥 자본가계급의 도덕을 그속에 담는데 있었다. 정직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번창하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얻을 것이 없다. 신흥 자본가들은 그림 속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한 것이 아니라 그림이 나타내주는 도덕과 자신을 동일시 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화가들은 중세의 세밀화에서와는 달리 의례적인 배경으로서 농민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도시 시민의 우월감을 갖고 농민을 희화화하고 얕잡아 보는 그림을 그렸다. 음주, 가무 등이 풍속화를 대표하는 주제였다. 손에 곡괭이나 쟁기, 낫을 가지고 들판에서 일하고 있는 농민을 제대로 그린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림> 할스, 보헤미안

여기서 농민은 반은 짐승이리고 불러도 좋을 어리석음과 야만성으로 뭉쳐진 우스꽝스런 교양없는 인간으로 묘사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실내를 배경으로 그린 회화에서는 이들은 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듯이 그려진다. 할스가 그린 초상화에서 이들은 늘 웃고 있는데 이는 부자들을 그린 그림에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도 행복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부자들이 이 세계의 희망의 원천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브뤼겔, [농민의 결혼식]

1-1-3. 브뤼겔의 풍속화

네덜란드에서는 한 세기 전인 I6세기에 브뤼겔이 그러한 그림을 선구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브뤼겔은 농민의 정경이 단순히 외적 무대의 배경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한 최초의 화가였다. 그는 신흥 중산계급 위대한 대변자였다. 브뤼겔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인문주의자들의 친구였으며 합스부르크가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브뤼겔은 주로 농민들의 생활 장면, 떠들석하게 잔치를 벌이고 일하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브뤼겔 자신은 도시 사람이었고 농촌의 순박한 생활에 대한 그의 태도는 세익스피어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촌뜨기를 우스개거리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풍조였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고자 할 때 하층민에서 그 모델을 구했던 것이다.


<그림> 브뤼겔

브뤼겔의 그림에서 노동하는 모습도 등장한다. 여기서 보여지는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기득권층의 그것. 즉 완전한 만족 상태이다. 힘찬 걸음걸이의 시골 아낙네들, 굳건하게 세워진 주홍빛 벽처럼 가득찬 옥수수를 거둬들이는 농민들, 수확할 때의 열기, 일꾼들의 부지런한 모습 등 모든 것들이 완전한 긍정을 나타낸다. 거기에는 사회적 긴장과 저항은 없다. 브뤼겔의 회화도 비민중적이라는 점에서는 이 시기 다른 바로크 예술과 공통된다.

농민들의 생활을 묘사한 예술이 곧 농민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며, 실제는 그 반대이다. 에술에서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모사한다든가 자신들의 사회적 환경을 묘사하는 것은 대개 보수적인 계층, 사회에서 그들의 위치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억압되어 있거나 상승하는 계층은 그들이 목표로하는 생활 상태를 보기를 원하지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나오려고 하고 있는 현재의 괴로운 생활 상태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마치 오늘날 노동자나 소시민이 자신들의 생활이 아닌 부유한 사람들의 생활을 연속극에서 보고 싶어하고, 19세기 노동자 연극이 민중극장이 아닌 대도시의 상류층이 애용하던 극장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듯이브뤼겔의 예술 역시 농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농민들보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계층, 아무튼 농민이 아니라 도시민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안트워프에 체류했다가 1562-62년에 궁정적 귀족적인 브뤼셀에 정주했다. 그의 회화는 근대적인 냄새를 풍기면서도 봉건적 재편성에 귀착한 남부 네덜란드의 정세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1-1-4. 바로크 시대의 풍속화

17세기에 바로크의 궁정예술이 지배한 프랑스나 스페인에서도 예외적으로 노동계급의 현실적 생활을 선택한 화가들이 존재하였다. 이들에 의해 농민이나 직공의 생활과 노동에 대한 예술적 표현이 등장하였다. 스페인의 벨라스케스(1599-1660)는 초기 작품인 [계란 붙이는 노파]나 [세빌리아의 물장수]에서 그는 개개의 인물의 성격과 인물을 힘차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상적인 광경에 의식과 같은 장중한 정신이 들어 있다. 그후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로 임명되어 거기서 왕실의 초상화를 주로 그리며 그의 여생을 보냈다. 이런 생활속에서도 벨라스케스는 [여직공]이라는 작품을 통해 여성 노동자를 그렸고, 또한 헤르메느가 마르스(전쟁의 신) 때문에 무기를 주문하기 위해 [불카누스의 대장간]에 오는 그림을 그렸다. 전자의 노동을 그린 그림이나 후자의 신화적 회화는 당대 공업 노동발생의 새로운 현실을 포착하고 표현한 것이다.


<그림> 벨라스케스, [세비야의 물장수]


<그림> 벨라스케스, [불카누스의 대장간]

스페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가 필립 4세의 궁정사회와 함께 노동자의 모습을 나란히 그렸다면, 프랑스의 르냉 형제가 궁정의 기풍과 그들의 예술 형태를 뒤집은 주제로서 농민을 부각시켰다. 그들은 현실의 농민의 생활과 노동을 그렸다. 또한 이들은 농민이 아니면서 농민들에게 매우 동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묘사한 최초의 화가들이었다. 네덜란드풍의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이 해학적이거나 풍자적인데 반해 르냉 형제의 [농부의 가족]은 현실적인 묘사와 더불어 벨라스케스의 [세빌리아의 물장수]를 연상시키는 인간적인 위엄과 장중감을 거기에 부여하였다. 이 시기 농민들은 평균적으로 작은 집에 6-10명이 사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가구는 최소한의 것밖에 없었다. 탁자 하나 몇 개의 의자 찬장하나 이것이 대부분의 농업 노동자 거실에서 볼 수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한가족이 모여 식탁에 앉는 것이 불가능한 집이 많았고, 교대로 식사를 하든가 각자의 생각대로 거실의 곳곳에서 서거나 웅크린채 식사를 하였다.이러한 모습이 그들의 그림에서 주제가 되었다.


<그림> 르냉 형제, [농부의 가족]


<그림> 르냉 형제, [건초말리는 계절의 귀로]



1-2. 낭만주의

낭만주의는 18세기말의 정치 경제상의 혁명과 연관되어 있다. 18세기말 프랑스 혁명으로 자유주의 사상이 전유럽을 휩쓸고 구귀족계급에 대한 소생산자계급(후일 노동자와 자본가로 분화될)의 정치적 저항이 증대하였다. 이와 함께 18세기말 영국에서 자본주의 산업혁명의 시작되고 19세기에 전 유럽에 그 물결이 파급되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종래의 반귀족적 소생산계급은 이제 노동자와 자본가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노동자 계급의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하였으나, 이들의 생활 조건은 중세 농민의 그것보다 오히려 후퇴한 것이었다. 이 시기 공장노동자의 가계를 보면 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60%를 넘었고 여기다 옷값 주거비를 합치면 90%에 달하였다 (1834-44년의 영국 애쉬턴 언더라인의 주민). 하루 13-16시간의 장시간 노동으로 맨체스타 노동자의 평균 사망연령(1840년)은 17세였는데 이것은 맨체스터 시의 젠트리 38세, 농업주 러트랜드 노동자 38세, 그곳의 젠트리 52세의 어느 것과 비교해도 매우 짧은 것이었다. (Chadwick (1842)의 노동인구의 위생상태에 대한 보고서)


<그림> 고야,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프린시페 피오 산에서의 처형]

고야, 들라크르와 등 19세기 전반기의 낭만주의 미술가들은 우선 경제적 현실 보다는 민중의 정치적 항쟁을 그림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들은 표현한 것은 반귀족적 자유주의 정신이었다.


<그림> 들라크르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러나 중산계급의 정치적 지위가 점차 확고해짐에 많은 낭만주의 미술가들은 점차 현실로부터 후퇴하였다. 이들은 경제적인 측면 즉 산업혁명이 가져온 빈부격차의 현실을 외면한채 그 시대의 생활로부터 이탈해서 역사 문학 근동 등 상상력의 영역을 추구하였다. 낭만주의 미술가들은 구래의 귀족 계급의 억압에 대해서는 저항하였지만 새로운 자본가적 착취의 현실은 선택적으로 무시하였다. 다만 고야만은 일생동안 천한 직업을 주제로 다루는데 관심을 가졌다. 낭만주의 미술가들이 비운 공백은 19세기 중반 밀레 쿠르베 등 농촌 출신의 새로운 현실주의의 화가들이 차지하였다. 이들 현실주의 화가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에서 노동 문제를 가장 중요한 주제로 취급하였으며,노동계급의 현실과 고통을 노동자나 농민의 입장 서서 있는 그대로 형상화하려고 하였다.

고대 이집트 예술에서는 노동자가 봉건 영주나 지주의 충실한 노예로 그려지고. 14, l5세기에는 안정되 농촌 노동자를 보는 것을 유쾌하게 셍각한 대 귀족의 입장에서 농민이 그려졌으며, I7세기의 네덜란드의 회화에 있어서 농민이 자기 우월성을 인식하려는 도시 중산계급의 입장에서 그려졌다. 마찬가지로 19세기 노동자를 다룬 미술에서도 중산계급적 관점이 지배하였지만, 노동 계급이 사회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런한 관점은 점차 수정되어 갔고 노동 계급을 대변하고 그들과 한층 결합된 미술이 등장하게 되었다.

1-2-1. 도미에

도미에는 현실에서 눈길을 돌리지 않은 낭만주의 화가의 한사람이었다. 날카로운 정치적 풍자화가인 도미에는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파리의 여러 주간지에 풍자화를 기고하며 살았다. 1840년대에 그는 유화로 전향했는데 그의 작품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는 대중은 없었다. 불과 몇몇 친구들만이 그에게 용기를 주고, 그가 죽기 일년전에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 주었다.

그 당시 노동계급을 일컫는 민중le peuple은 밀레나 쿠르베 뿐만 아니라 도미에의 인쇄공 그림에서 똑같이 구체화될 수 있었다. 도미에는 격렬한 증오를 가지고 노동자에게 굴욕과 영락을 강요했던 사람들을 그렸다. 이와 함께 굴욕과 영락의 당시자인 노동자를 그렸는데, 그의 작품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의식을 갖고 있는 자로서 또한 정치혁명의 참가자로서 취급되고 있다. [인쇄공은 자유를 옹호한다]가 바로 그것이다.


<그림> 도미에, [인쇄공은 자유를 옹호한다]

도미에는 도시 하층민의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었다. [삼등열차]는 극히 자유롭게 그려져 있으며 조야한 미완성의 작품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그림의 힘은 자유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삼등열차]에서 그는 특수한 근대적인의 상황, 고독한 군중을 포착했다. 그들에게 공통된 것은 서로가 같은 열차로 함께 여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몸은 섞여 있으면서도 서로 남을 의식하지 않으며 각자 자기의 일만 생각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존엄성에 대한 그의 감정은 르냉 형제를 생각나게 하는 데가 있다.


<그림> 도미에, [삼등열차]


1-3-1. 현실주의의 발전

19세기 중기에 흥하기 시작한 비판적 현실주의는 현실생활을 반영하는 넓이와 깊이에서 그 광범함과 생동감이 공전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이들은 낭만주의자들의 혁명과 정치적 격변속의 민중이 이나라 생활과 현장속의 노동자를 묘사하기 시작하였다. 토지에서 땀흘리며 일하는 농부의 이미지는 형이상학적 실체인 '민중'의 구체화로 나타난다. I9세기에 전유럽에 근대사회가 확립되자, 노동 계급과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회화와 조각도 명확한 현실주의적 경향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떤 예술가는 직접 농촌에서 배출되고 흑은 농촌에 가깝게 접근했다. 그들은 그 시대의 구체적인 경험과 모습을 성실하고 진지한 태도로 창조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들은 현대 생활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과거의 웅장한 주제와 과장된 수식을 거부했으며 그 때까지 무시되어왔던 현실적 경험의 영역 -도회와 시골의 수많은 빈민, 당대의 여인 특히 타락한 여인, 노동자와 무숙자들-으로 복귀했다. 그 시대의 주제들 가운데 노동만큼 현대적 상황의 축소판으로 보인 것은 없으며 또 노동만큼 유럽 전역에서 다루어진 것은 없다.

1848년의 혁명은 노동의 문제를 주요 관심사로 부각시켰다. 예술가들이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의 생활에 진지하고 일관된 태도로 대하여 그들의 일과 그 일들의 구체적인 환경을 중요한 주제로 묘사하게 된 것은 민중의 고귀함과 노동의 존업성을 일깨운 1848년의 혁명을 통해서였다. '그 혁명의 동기와 그에 따른 결과는 우리 정신에 강렬한 영향을 주었다. 우리는 새로운 사회계층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을 살펴 보았고, 거리와 들판을 좀 더 유심히 관찰했으며, 우리 자신을 비천한 사람들의 열망과 감정에 결부시켰다. 예술은, 이전에는 오직 신과 귀족들을 위해 존재했던 명예를 그들에게 돌렸다'. 여가 속에 사랑과 탐욕에 빠진 귀족과 부르주아의 생활이 아니라 뼈빠지게 일하는 생산자들의 노동이 주제가 되었다. I6세기의 브뤼겔이나 민중을 측은히 여긴 르낭 형제와 달리, 현상에서 노동하는 농부의 모습이 포착되어 집중적으로 형상화되었다. 이제 춤추고 있는 농민이나 술 마시고 노는 농민은 그리지 않는다.

1-3-2. 밀레

농업노동의 소재는 밀레의 그림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브뤼겔이 성장하는 중산계급의 눈을 통해 보았던 것을 밀레는 비로소 농민의 눈을 통해 보았다. 브뤼겔은 아니었지만 밀레는 '농민화가'였다. 밀레는 파리 근교의 농촌 바르비종에서 27년간 살면서 오래동안 해가 뜨면 일하러 가고 해가 지면 돌아오는 농촌생활을 했다. 밀레는 흙속에 융화된 흙을 파서 먹고 사는 농민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하였다. 그 이전의 미술에 나타난 농민은 흙과 분리된 사실상의 비농민이었다.

그는 농민의 생활과 노동에 배어 있는 음울함, 비참, 절망감 등을 방관자가 아닌 농민의 입장에서 그렸다. 그의 [씨뿌리는 사람], [이삭줍는 사람들]은 농민이 농사일로 죽도록 고생하다가 최후에는 '이삭을 주워 주린 배를 채우는' 처지로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그린 양치기 아낙네들은 바로크의 수줍음 타는 양치기 소녀들과는 조금도 닮아있지 않다. 그녀는 누추하고 볼품없는 옷을 입고 피곤한 몸을 지팡이에 기댄채 저주받은 인간의 유령처럼 멍청하게 서있다. [이삭줍는 사람들]을 보자. 얼굴은 보이지도 않고 등을 구부린채 머리를 거의 땅에 처박고 손으로 흙속을 파혜치는 모습은 모든 인간성이 상실된 모습을 보여준다. 대체로 시골 노동을 대하는 밀레의 태도는 주관적 감상에서부터 객관적 정확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럼에도 밀레의 회화는 단순한 사실성을 넘어서 농민에 대한 연민의 정과 농업노동의 고귀함을 담고 있다. [저녁종]이 특히 그러한데, 물론 이 점은 농민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신화이다.


<그림> 밀레, [씨뿌리는 사람]







<그림> 밀레, [이삭줍는 사람들]

1-3-3. 쿠르베

낭만주의 작가로 출발한 쿠르베는, 1848년 혁명의 격동속에서 감정이나 상상력을 강조하는 낭만주의란 그 시대의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믿게 되었다. 이제 예술가는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에 의존해야 한다. 쿠르베는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당시의 낭만주의의 현실도피적 경향에 반대하는 자신의 회화적 입장을 표현하였다. 쿠르베는 1855년에 {리얼리즘 - G. 쿠르베}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것은 182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한 현실주의(리얼리즘)하는 용어가 역사성을 부여받은 사건이다. 마치 1874년 전람회에서 마네의 [인상, 해돋이]라는 그림 제목에서 인상주의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듯이.

그의 현실주의는 미술에서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실을 원했다.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노동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제시하였다. 두 사람의 시골사람 한 노인과 한 소년이 밑바닥의 비참한 양태의 노동에 종사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1848년 혁명의 이상을 충족시킨 대표작으로 갈채를 받았다. [돌깨는 사람들]은 시골에서 고생스럽게 일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창조하는데 관심을 가진 예술가들에 아주 흔한 주제였지만 쿠르베 만큼 그 상황의 세부적인 사실까지 현실적으로 아주 완벽하게 포착하여 형상화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쿠르베와 밀레는 둘다 시골의 고된 시간들을 생생한 이미지로 창조하는데 관심을 가졌지만 쿠르베의 엄격한 현실주의 해석이 시골 노동에 대한 구체성과 동시대성의 이미지가 훨씬 두드러진다.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들]과 밀레의 [이삭줍는 사람들]의 비교해 보자. 밀레의 작품은 19세기 농부들이 장원 일꾼들보다 훨씬 힘든, 틀에밖힌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초월한 그 어떤 것을 시사한다. 즉 일반적인 노동의 윤리적 아름다움이라는 안락한 암시를 전한다. 그림의 형식 구성에서도 이런 암시가 전달되는데, 배경으로부터 펼쳐지는 장대한 전경, 인간의 노고와 등이 휠 정도로 힘든 노동을 모두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세 여인이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습, 지평선 저멀리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흐릿하게 표현한 것 이런 것들이 모두 그림을 보는 사람들을 직접적인 경험의 영역을 넘어선 초월적 가치의 세계로 인도한다. 인물들이 이상화 일반화되었으며 그 자세와 옷, 분명함에 있어서 다분히 전통적이다. 인물들의 움직임과 배치에는 계산된 리듬이 있어 이것이 전체 구성에 안정감을 주고 화가가 추수 작업을 엄숙한 의의를 지닌 장면으로 보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림> 꾸르베, [돌깨는 사람들], 1849

꾸르베의 [돌깨는 사람들]은 그 기념비적 크기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두 노동자의 육체적 실존과 그들이 그림의 요소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외에는 아무것도 시사하는 바가 없다. 돌깨는 일은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언제나 사회의 최하층 계급의 몫이었다. 돌깨는 일은 하찮은 무의미한 노동의 대표적인 예이며 수많은 근육노동 가운데 가장 저급한 것이다. 전통적인 회화에서 이같은 인간성 부재의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쿠르베는 어느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시골 지방의 빈민 두사람을 그렸을 뿐이다. 그는 그들을 등신대로 그렸는데, 밀레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잇는 파토스나 감상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고 견실하게 있는 그대로 그렸다. 즉 젊은 사람의 얼굴은 돌려져 있고 노인의 얼굴은 모자에 반쯤 가려져 있다. 한 사람은 이렇게 고된 일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한사람은 너무 늙었다. 두 사람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동시대성의 느낌은 그들의 경직되고 어색하고 톤이 분명치 않은 모습으로 인하여 더욱 두드러 진다. 쿠르베는 그들의 차림새를 세심하게 관찰했고, 인간의 육체를 이상화 일반화했던 전통적 방법을 거부했다. 밀레의 인물들과 달리 쿠르베의 인물들은 관습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고 있고 일반화된 외형을 취하지 않고 또한 전통적인 인물 스타일을 부분적 변형도 아니다. 그의 인물이 육체노동자의 본래의 특질 즉 경직된 자세 어색함 무뚝뚝함 등에 부합되고 있다. 돌깨는 사람을 돌깨는 사람이라고 부른 사람, 또 그 문제를 사실 그대로 인식하고 사실 그대로 표현한 사람은 쿠르베 뿐이다. 사실 그는 그 당시에 돌깨는 사람을 그가 깨는 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이 그림은 노동의 이미지를 정확하고 진지하게 동정적으로 창조하려고 했던 모든 움직임의 기초였다.



1-3-4. 반 고흐

19세기 후기 화가들중에서도 반 고호는 자신의 초기의 작품들에서,시골의 가난하고 천박한 사람들의 단조롭고 지루한 생활을 묘사하였다.


<그림> 반 고흐, [감자먹는 사람들], 1885

자본주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비참한 조건에 충격받은 반 고호는 농민과 가난한 노동자에 깊이 공감하였다. 그도 농민화가였다. 그것은 그가 농민들의 아름다움을 그려서가 아니라 자신과 마찬가지로 삶의 근심을 지닌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속 깊이 친근감과 유대감을 느낀 점에서 그러하였다.


<그림> 반 고흐, [늙은 농부](인내의 계단), 1888

반 고흐는 밀레를 모방하면서 그림을 시작하였고 천재의 외로움속에 그를 뛰어 넘었다. 고흐는 밀레의 농민들을 더욱 처절하고 절망적인 모습으로 재현한다. 반 고흐는 밀레가 그린 것 보다 훨씬 더 브뤼겔에서 벗어나 있다. 반 고흐가 화가로 출발한 이후 불과 10년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의 경력은 짧다. 그 사이 그는 공업이 발달한 사회의 가치에 대한 깊은 불만을 품고 가난한 억눌린 탄광 노동자들 속에서 평신도의 신분으로 목사의 역할을 맡아 활약하기도 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격렬한 애정이 그의 전기 그림에 넘쳐 흐르고 있다. [감자먹는 사람들]에서는 그는 농부의 가족에게 저녁식사는 의식으로서의 엄숙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을 그려낸다. 그는 농민들의 일상적인 식사시간이 그들의 인간성과 도덕적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때로 보았다. 몇 년후 파리에서 프로방스 지방(아를르)으로 간 반 고흐는 이전의 그의 주제인 농민을 재발견하고 흙과 태양으로 형성된 지중해의 농부를 감동적으로 그렸다. 이것은 서구 회화의 전통에서 마지막 사실적인 농부의 초상화이며, 또 유일하게 위대한 농부의 초상화일 것이다.

3-5. 뫼니에와 콜비츠

뫼니에는 브뤼셀에서 태어나 19세기 후반에 조각가로서 활약하였다. 그의 작품은 사실적이면서도, 당시 다른 조각가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수성이 있다. 그는 탄광의 광부나 철공소의 직공 등 근대 산업사회의 노동자 계급을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 특히 그의 주제가 된 노동자들의 상에는 강건한 골격과 생활력, 소박하고 장중한 모습이 잘 드러나 매우 영웅적인 삶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광부들의 귀환]이나 [부두의 작업부]등이 그러하다.


<그림> 뫼니에, [광부들의 귀환]

콜비츠는 의사인 남편과 노동자 지구에 살면서 경험한 비참한 생활을 주로 그렸다. 그는 [방직공의 봉기] 연작, [농민전쟁] 연작]을 제작하였고 나중에는 전쟁으로 아들을 잃고 [전쟁은 다시 있을 수 없다] 등의 반전운동의 주제를 다루었다. 콜비츠는 하층 노동계급의 비참한 삶, 빈곤, 저항, 좌절된 꿈을 예술로 나타내고자 하였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인생에는 즐거움도 있을 텐데 너는 왜 비참한 것만 그리는 거냐?'.내가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나는 처음부터 노동계급의 생활에 동정을 느끼거나 공명하지는 않았다. 나는 뒷날 내 남편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생활의 고뇌와 비애를 알게 되었다.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다가 끝내는 내게 조차 매달리는 여자를 보면서 프롤레타리아계급 바로 이들을 무겁게 짓눌러 오는 모든 운명이 나를 붙잡고 놓지 않음을 알았다.'

콜비츠의 회화는 유화가 아니라 흑백의 그래픽 판화가 중심이 되고 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판화만이 수백점씩 손쉽게 찍어내어 노동계급의 사람들 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미술 장르였고, 심미적 목표와 연관된 색채를 쓰지 않고 검정 회색 흰색으로 인간의 아픔과 슬픔 사회의 어둠과 분노를 더욱 적절하게 표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생명에 대한 경외를 표현하며 소외된 계층과 더불어 공존하는 새로운 인간 공동체 형성을 갈망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연대 의식을 불러 일으킨다. '나의 작품 행위는 목적을 가진 것이다. 구제받지 못하는 사람들, 상담도 변호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이시대의 인간들을 위해 한가닥 책임과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림> 콜비츠, [직조공의 봉기]

[직조공의 봉기]는 1893년 콜비츠는 하우프트만의 극 [직조공]을 관람하고 나서 4년간에 걸쳐 제작한 6장의 연작 판화이다. 이 작품은 사태의 긴급성, 죽음, 상담, 직조공의 행진, 폭동, 종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우프트만의 극은 소재를 1844년 슐레지엔의 방직공 봉기에 근거한 것이었다. 콜비츠는 가난과 병고의 문제가 노동자나 시민 개개인의 문제임에 틀림없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전체의 문제임을 절감하였고, 가난과 질병의 퇴치는 사회의 제도적 개혁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이러한 판화로서 사회에 알리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은 졸라의 [제르미날]이나 하우프트만의 [직조공] 이상으로 직접적이고 급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1-4. 노동 미술의 한계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는 얼마가지 않아서 자본가에 의해서 착취 당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그들의 괴로운 경제상황은 콜비츠의 판화에 극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들의 비참한 처지를 벗어나기 위한 투쟁은 19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노동자들의 고난과 투쟁과 함께 I9세기 말의 예술에서는 이전에는 불가능했었던 하나의 새로운 관념이 확실히 작품으로 표현되었다. 벨기에의 뫼니에의 조각에서 보이는 노동자의 힘과 영웅주의적 관념이 그런 것이다.

이러한 노동미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수요자는 거의 시민계급이었다. 노동자들은 전람회에도 가지 않았으며 본래 노동자 대중적 수요를 목표로 찍은 노동미술 판화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이 결과 대부분의 노동 미술에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선 노동의 혁명적 해방의 계기는 사실상 제거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하에서 노동미술의 한 극단을 보여주는 콜비츠의 판화는 노동자를 수난자로서 파악하고 이에 대한 동정을 표방하고 있으나, 그것의 기조는 역시 지식인으로서의 비관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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